은혜나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눕니다!간증 내가 받은 기도 응답(3) : 하나님의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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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아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7,767회 작성일 13-07-19 17:24본문
이십대때 신약성경을 통독한 적이 있었다. 종교적 관심이라기보다는 번역된 사회과학책을 읽다보면 성경속 인물이나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비기독교인이거나 성경적 지식이 짧은 사람이 직역하게 되면, 중간에 앞뒤 문맥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 문맥이 꼬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면 대충 비유를 건너띄고 본문을 쫓아가지만, 간질간질한 느낌들이 매우 불편했다.
뭐가 그리 답답했었는지 지금은 예로 들 수는 없지만 아무튼 성경에 대한 일독이 없이, 번역된 서양사상 관련 책들을 읽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라니 한번 읽어두자고 작정한 것이다.
구약은 일단 양이 너무 많아서 (구약까지 있는 성경책은 사야했는데... 솔직히 그 당시 내겐 좀 비쌌다.) 엄두를 못내었고, 집에 있던 신약성경은 읽은 적이 있는데... 처음 42대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기가 질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읽은 기억이 새롭다.
작년에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1장이 읽기도 만만찮은 글자들이 아니라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다간 사람들 이름으로 읽혀서 스스로 깜짝 놀랬다. WOW!! (물론 절반 정도지만)
마태복음은 정말 많은 내용이 있고, 그때 읽은 구절 중 나도 모르게 나를 지탱하게 해준 말씀들이 꽤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기도문과 겟세마네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문이 가장 가슴을 울렸었다.
나의 원과 아버지의 원이 그 진정성은 만나면서도 외양은 서로 다를 수 있는 상황이 참 절절했고, 그 상황에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었다. 지금 그 구절을 떠올리면 아버지에 대한 무한신뢰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에 대한 순종 등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참 어려운 시간에 행한 어려운 결단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온다.
이 느낌을 나는 이렇게 패러디해서 쓰고 있다. 즉, 어느 순간부터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는게 좋은지 자체를 모르는 일을 놓고 다급하게 기도할 때면 “이러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된다.
늘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께 그냥 맡기는 것이 가장 낫겠다는 영악한 생각도 한 켠에 있고, 이 모든 것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흘러갈 일이니 완전 항복(?) 내지는 순종하겠다는 피조물의 셈본도 있다. 어쨌거나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기도하는 것이고,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다 와서 쉼을 얻으라 하셨으니, 확실하게 이런저런 문제들을 예수님께 인수인계하고 나면 염려가 정말 사라진다.
추리소설의 끝까지 주인공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주인공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받고 나니 점점 더 염려나 근심은 없어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 보기에 너무 무사태평하게 보이거나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사는 것처럼 비칠까봐 외교적인 겸손모드로 이야기하고 나면 금새 하나님께 죄송한 기분이 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 해결해주실 거니 난 염려하지 않아”라고 말할 만큼 온전하고 깨끗한 믿음을 가질려면 한참 멀었나보다. 오늘 금요일 철야예배를 몇 시간 앞둔 지금, 기도제목을 몇 가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맘으로 글을 시작했다.
일일이 내용을 적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요즘 기도를 게을리하는 나를 챙기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일지 슬슬 기대가 된다.
뭐가 그리 답답했었는지 지금은 예로 들 수는 없지만 아무튼 성경에 대한 일독이 없이, 번역된 서양사상 관련 책들을 읽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짓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이라니 한번 읽어두자고 작정한 것이다.
구약은 일단 양이 너무 많아서 (구약까지 있는 성경책은 사야했는데... 솔직히 그 당시 내겐 좀 비쌌다.) 엄두를 못내었고, 집에 있던 신약성경은 읽은 적이 있는데... 처음 42대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기가 질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읽은 기억이 새롭다.
작년에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마태복음 1장이 읽기도 만만찮은 글자들이 아니라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다간 사람들 이름으로 읽혀서 스스로 깜짝 놀랬다. WOW!! (물론 절반 정도지만)
마태복음은 정말 많은 내용이 있고, 그때 읽은 구절 중 나도 모르게 나를 지탱하게 해준 말씀들이 꽤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주기도문과 겟세마네에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문이 가장 가슴을 울렸었다.
나의 원과 아버지의 원이 그 진정성은 만나면서도 외양은 서로 다를 수 있는 상황이 참 절절했고, 그 상황에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었다. 지금 그 구절을 떠올리면 아버지에 대한 무한신뢰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에 대한 순종 등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이지만, 그래도 참 어려운 시간에 행한 어려운 결단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온다.
이 느낌을 나는 이렇게 패러디해서 쓰고 있다. 즉, 어느 순간부터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는게 좋은지 자체를 모르는 일을 놓고 다급하게 기도할 때면 “이러이러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된다.
늘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께 그냥 맡기는 것이 가장 낫겠다는 영악한 생각도 한 켠에 있고, 이 모든 것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흘러갈 일이니 완전 항복(?) 내지는 순종하겠다는 피조물의 셈본도 있다. 어쨌거나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기도하는 것이고,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다 와서 쉼을 얻으라 하셨으니, 확실하게 이런저런 문제들을 예수님께 인수인계하고 나면 염려가 정말 사라진다.
추리소설의 끝까지 주인공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주인공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받고 나니 점점 더 염려나 근심은 없어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 보기에 너무 무사태평하게 보이거나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사는 것처럼 비칠까봐 외교적인 겸손모드로 이야기하고 나면 금새 하나님께 죄송한 기분이 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 해결해주실 거니 난 염려하지 않아”라고 말할 만큼 온전하고 깨끗한 믿음을 가질려면 한참 멀었나보다. 오늘 금요일 철야예배를 몇 시간 앞둔 지금, 기도제목을 몇 가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맘으로 글을 시작했다.
일일이 내용을 적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요즘 기도를 게을리하는 나를 챙기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방법은 어떤 것일지 슬슬 기대가 된다.
댓글목록
봄아짐님의 댓글
봄아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8월까지 1년간 제가 받은 응답들을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55차 특새기간을 깃점으로
9월 이후엔 내가 받고 싶은 응답을 통해 제 기도제목을 정리할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표를 하는 것은
글을 올리는 피울 지도 모를 게으름을 조금이라도 줄여볼까 하는 맘에서..
뭔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싯점이라서 정리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담희아빠님의 댓글
담희아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